자아란 무엇인가?

자아란 무엇인가?

차례

자아는 자기 스스로를 느끼는 의식, 즉 “자의식” 혹은 “의식”의 주체를 말합니다. 그러나 명확히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의식은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어서, 추상적으로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의 것이 아니지만, 그 대상을 명확히 정의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 자아의 느낌은 내가 나라고 느끼는, 바로 나만이 아는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로 자아의 존재를 설명했고, 존 로크는 자아를 의식과 기억의 연속으로 보아, “사고하는 존재”로 정의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인간이라 자아를 느끼고, 그래서 인간들은 모두 자아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인간 외의 포유류, 파충류 등 인간의 분류상으로 하등동물로 내려갈수록 의식의 존재 여부에 대해 의심이 생깁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러면 자아와 지능은 다른 것일까요? 아주 간단하게 지능과 자아를 구분해 보면 이렇습니다. 지능을 똑똑함이라고 정의한다면, 즉 성능, 능력 같은 것이라면, 생물체의 일부 기능이기는 하지만, 마치 기계로 대체될 수 있을 것 같은, 그래서 생물적인 필수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느낌이 듭니다. 반면 자아는 우리가 원시 세포로부터 진화해 오면서, 진화의 결과로 만들어진 우리 인간들이 각각 느끼는 “살아있다는 느낌” 그 자체이므로 생물체의 기본 속성으로 생각됩니다. 달리 말하면, 지능은 뇌와 같은 어떤 기관이 진화의 단계에서 발명한 발명품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러프한 생각이지만, 자아는 “살아있는 느낌” 그 자체라 생물체, 특히 동물 등의 기본 속성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살아있는 느낌”을 인공지능 기반의 로봇이 가질 수 있을까요? 즉 인공 자아가 가능할까요? 이 질문이 우리 이야기의 시작점입니다.

이제 조금 더 자세히 자아에 대해 느껴봅시다. 생각을 하려 하면, 꼬리를 무는 생각들이 덩어리로 떠오르고, 내가 담겨져 있는 세상을 바라볼 수 있고, 내가 걸어가면, 그 세상 속을 움직이는 이 느낌, 그래서 나라고 통칭하는, 크게 보면 내 옷을 포함한 몸 전체가 이 세상에 있는 그 느낌, 이것이 자아이고, 이것을 인식하는 느낌을 자의식이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나”를 느끼는 느낌을 우리는 “자아”라고 합니다. 그러면 자아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세상 속에 놓여 있음을 오감을 통해 알고 있고, 오감은 뇌에서 처리되고 있으니, 당연히 나의 의식이 숨어 있을 듯한 곳은 뇌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뇌는 멀티잡을 하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나는 살아 있으니까요. 그런데 내가 나를 느끼는 이 순간은 보통 한 생각만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사라지면 다른 생각이 들고, 생각은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가끔 단절이 되기도 하지만요. 그리고 오감의 느낌들이 나를 둘러싸고 있고, 내가 그 오감 중 하나에 집중하는 순간 생각은 그 방향으로 흐릅니다. 오감은 마치 배경처럼 펼쳐져 있고, 흐미하게 나를 둘러싸고 있지만, 한 순간 그 중에 내가 집중하는 즉 “포커스”를 맞추는 순간, 거기로 전환됩니다. 그래서 음악을 듣는 동안, 어떤 생각에 빠질 수는 있는데, 그 음악이 인식되는 순간, 생각이 전환됩니다. 그래서 생각은 나의 과거의 기억일 수도 있고, 오감으로부터 오는 실시간 정보일 수도 있습니다. 음악으로 그 초점을 맞추는 순간, 내 뇌는 그 리듬과 유사한 음악을 들었던 기억들을 검색해 내고, 음악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그 음악을 들었던 그 순간, 기억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여기에서, 한 번에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두 개이거나, 유사한 생각의 뭉치일 수 있습니다. 다만 이야기하려고 하는 것은, 내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 내 뇌에서 처리하고 있는 모든 일에 관련된 생각들이 다 함께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뇌 속에 있는 기억, 뇌가 활동하면서 처리하는 모든 정보 중, 하나를 내가 스스로 골라서 생각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뇌 속의 어떤 기관이 나에게 던져주는 것일까요? 모든 것들 중에 하나만 골라서,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을 보여줄 것입니다. 뇌가 진화하면서, 방금 말했던, 뇌의 활동 정보와 연관된 기억 정보들을 스스로 처리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리하여 하나의 생각의 뭉치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것이 가장 좋은 답이 될 것입니다. 군대로 비교하자면, 각 병사들은 각각의 일을 팀 단위든지, 개인들이 따로 따로든지 수행하지만, 계획했던 일들을 진행 중 그 계획을 계속 수행해야 할지, 변경해야 할지는 각 병사들의 수행 결과들을 종합하여 보고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그 군대의 대장이 그것을 받아서, 다음 행동을 결정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기서 왜 자아가 생명체에게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에 대한 해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렁이에게도 자아가 있을까, 개에게 자아가 있을까? 하는 질문이 어리석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생명체는 신경 조직을 갖추었든지, 원시 신경 조직이든지, 진화의 방향은 그 정보들이 한 곳에 모이게 하여, 개별적으로 처리하면서도 종합하여 한 생각을 만드는 방향으로 진화했습니다. 한 곳에 모이지 않으면 팔, 다리가 각각 알아서 움직이면 되었겠지만, 팔이 움직일 필요는 눈이 만들어낼 수 있으니 그 정보를 한 군데 모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래 다 모았습니다. 어떤 정보들은 각각 몸속에서 기관들에게 온 정보들을 알아서 분석해서 다른 기관에 명령을 내려 그 효율성을 최대화하여 좀 더 고등생물로 진화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장이 필요했습니다. 여기서 대장이라는 용어가 실제 나의 자아가 전체 몸의 가장 우두머리라는 뜻은 아님을 알고 가야 합니다. 대장이 필요함은 개별적인 처리조차도 팀 단위의 정리가 필요했을 것이고, 당연히 뇌의 발전은 기초적인 원시 데이터 처리, 분석, 관련 정보의 종합화는 뇌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과정일 것입니다. 동물이 생태계 속에서, 약육강식의 세계 속에서 살아남아 자손을 퍼트리고 그래서 그 종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진화의 선택, 바로 “자아”입니다.

다만, 이런 일반적인 뇌의 활동 모두를 다 함께 한 곳으로 집중시켜, 그중 가장 중요한 정보, 판단해서 처리해야 할 가장 우선순위의 정보를 다시 선별하는 기관이 있었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자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다시 우리의 자의식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 자의식은 스스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니, 스스로를 그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정보들 중, 생각의 뭉치를 만들어 내는 기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감으로부터 오는 정보들을 배경처럼 깔아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에 초점을 맞추기 전에는 배경 정보와 같습니다. 그래서 배경 정보는 오감을 통해 옵니다. 시각, 청각, 촉각, 미각, 후각. 그런데 하나 더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느낌인 듯, 몸의 상태, 내장들의 상태라고 해야 하나, 혹은 그것을 넘어서, 몸의 컨디션 같은 것, 즉 “기분”입니다. 다른 말로는 감정입니다. 화장실을 잘 갔거나, 몸이 가뿐함을 느끼면 기분이 좋습니다. 아마도 뇌가 몸의 모든 상태를 체크한 후에 만들어내는 몸의 상태일 것입니다. 그래서 6가지 상태가 배경 정보로 놓여집니다. 자 그러면, 6개의 모니터(시각적인 것처럼 보여지지만, 6개의 배경 정보의 모니터라고 하겠습니다)로부터 정보를 받아들이면서, 그냥 흘러가는 느낌으로 배경잡음 정도로 느끼다가 무념에 있다가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대부분 그 생각은 배경 정보 중 하나에 내가 포커스를 맞추는 순간 뇌가 관련된 기억들을 끄집어내면서 발생한다고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글을 작성하는 이 순간은 나는 6개의 배경 정보 중에서 시각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시각 중 내가 타이핑하는 그 부분에 더욱 포커스가 가 있으면, 이 글과 관련된 생각이 머리에서 이어지면서 손은 키보드를 치고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몰입”이라고 합니다. 시각, 생각, 손가락 동작이 큰 의식이 없는 한 생각들의 흐름으로 일체가 되어 이어지는 과정을 몰입이라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자아가 하는 역할을 단순하게, 하지만 어느 정도 명확하게 생각해 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어떤 일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글을 쓰게 하고, 사냥을 하게 하고, 지금은 냉장고를 열어 음식을 꺼내어 먹게 하고,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가게 합니다. 즉 자아는 내 몸이 단일한 하나의 일을 하게 합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그럼 우리가 처음 질문했던 걸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렁이에게도 자아가 있을까요? 아니면 작은 자아와 큰 자아가 있을까요? 우리가 단순화 시킨 자아의 모델에서는 내 몸 전체의 정보를 종합하여 하나로 만들어 내는 능력, 그리고 그 몸이 가지고 있는 외부 환경의 감지 기관이 감지해 내어 만들어내는 정보, 그리고 내 몸의 상태를 표현하는 정보가 한 곳에 만나, 다음 행동을 정하는 것이 자아의 역할이니, 감지 기관의 단순한 정도, 내 몸의 단순한 정도, 그리고 내 뇌가 만들어내는 생각의 뭉치의 단순화 정도에 따라 생명체의 자아가 자신을 느끼는 감정을 단순화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요? 반면 식물은 모든 정보를 중앙집중적으로 처리할 필요성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생존을 위해 진화의 길 중에서 이 길을 선택했습니다. 동물은 이동이 스스로 가능하기 위해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센서를 진화시켜야 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센서를 가진 생물을 고등 동물이라고 하고, 적은 센서를 가진 생물을 저등 동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뇌의 크기와 기능의 다양성으로 고등 동물을 분류하는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더 복잡한 작업을 하는 것은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식물을 저등 생물이냐라는 질문에는 또 다른 대답이 가능합니다. 우리는 뇌의 크기와 기능으로 동물을 분류하는 방법도 있지만, 염색체에 담긴 유전자의 크기로 판단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유효한, 실제로 그 생명체의 생애에 사용되는 유전자의 크기는 식물이 더 많습니다. 또한 밍크고래와 우리 인간이 누가 더 고등하냐, 저등하냐도 동, 식물이 다른 진화의 방향을 선택했듯이 뇌도 그 진화의 방향에서 다를 수 있습니다. 인간이 더 고등한 이유는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더 진화했고, 고등하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외부에 “기억 장치”를 둘 수 있는 유일한 생명체라는 것입니다. 이 기억 장치는 기록이라는 더 근본적인 행위를 가능하게 했고, 유전자로 후세에 전달되는 방식이 아니라, 취득한 정보를 후세에 전달하는 다른 방법을 만들어내어 문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는 점에서는, 정말 고등한 생명체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이 장점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트에서 다루겠습니다. 고등 동물이나 저등 동물이냐, 적은 자아냐, 큰 자아냐의 문제는 인간 본위의 관점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기능의 복잡성 등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박테리아를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현재 이 생태계의 주인입니다. 진화의 험난한 선택과 역동적인 지구에서 이들 모두 살아남았습니다.

댓글 달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