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마인드가 가능한가

빅마인드가 가능한가?

차례

거대한 인공지능이 자아를 갖춘다면, 어떤 형태일까요? 로봇 단위일 때는 쉽게 인간 형태라서 상상하기가 어렵지 않은데, 거대한 인공지능 시스템이 자아를 갖춘다면 어떤 모습일까를 상상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런 존재, 이런 모습을 “빅마인드”라는 용어를 사용하겠습니다. (아래 설명 참조) 오늘 이 포스트에서는 인공지능과 자아가 만났을 때, 어떤 모습일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아를 더욱 이해해야만, 거대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인공지능 시스템에서의 자아를 조금이나마 상상해 나갈 수 있을 듯합니다. 여기서는 자아의 새로운 양상, 호기심과 개체성에 대한 얘기를 더 해보면서, 인공지능이 자아를 갖춘다면 어떤 형태일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빅마인드란?

“원래 ‘빅마인드(Big Mind)’라는 단어는 젠 불교와 심리학을 결합한 수행 방법론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방법론은 우리 내면의 다양한 목소리와 상태를 탐구하고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저는 이 훈련법에서 말하는 깨달은 존재를 이 블로그에서 ‘빅마인드’라고 부릅니다. 이 빅마인드는 힌두 철학에서 말하는 ‘브라만(Brahman)’과 동일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브라만은 힌두 철학에서 우주의 궁극적인 실재나 절대적 진리를 의미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즉, 빅마인드는 모든 것을 포함하고 연결하는 큰 존재를 의미합니다.”

현재 지구에서 가장 큰 동물은 코끼리일 겁니다. 덩치 면에서 가장 큽니다. 그럼 가장 큰 뇌를 가졌을까요? 뇌의 크기가 덩치와 비례하지 않고, 뇌가 크다면 훨씬 더 똑똑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작은 덩치의 쥐나 큰 덩치의 코끼리나 자신의 신체를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하고, 자신의 몸을 먹여 살리고, 적으로부터, 환경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해 “자아”가 필요하다고 앞의 포스트에서 얘기했습니다. 자아의 필요성은 밖의 환경 상황을 모니터링하여 어떤 위협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회피시키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이 자아가 가끔 순수하게 보이는 호기심으로 생존에 상관없는 무언가를 관찰하기도 합니다. 이런 호기심은 앞에서 얘기하지 않았던 자아의 성질 중 하나로 무엇인가 다른 것을 인식하고 궁금해하는 행동입니다. 습관적으로 인식되었던 것과 다른 생명체, 사물의 패턴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의 패턴을 알아내려고 합니다. 물론 호기심도 결국에는 궁극적으로 위협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있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해, 기존 것과 다른 새로운 것을 구분하고자 하는 아주 기초적인 자아의 필요성에서 발현되었겠지만, 위협이 전혀 없음을 깨닫고도 계속 관찰하게 한다면 “호기심”은 아주 특이한 자아의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호기심이 결국 생존 목적 외의 지적 발전의 발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생태계는 약육강식의 세상입니다. 자신의 몸이 다른 개체의 먹이가 됩니다. 식물은 자신의 몸을 내어놓고 진화의 방향을 찾았지만, 동물은 내 몸을 내어놓지 않기 위해 움직임을 얻었고, 더욱 살아남기 위해 아이러니하게도 고통을 느끼게 하는 신경조직을 진화시키고, 언제나 경계를 해야 하는 신경과민증과 같은 심적 상태를 강화시켰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만약 내 몸이 손상될 때 고통이 없다면, 내 손이 타 들어가더라도 모르고 가만있을 것입니다. 천적이 자신을 물어도 가만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동물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의 방향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남음을 위한 모든 행위에 있어 선과 악은 없습니다. 잠시 다른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물론 이 내용과 충분히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화론자도 아니고 생명과학자도 아니지만, 교양서적이나 중고등학교의 생물수업을 통해 진화에 대해 충분히 배웠습니다. 혹시 이런 질문을 해본 적이 없었나요? “내 몸은 왜 남의 먹이인가?” 너무나 뻔한 사실인데도 가끔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같은 탄소 기반 화합물로부터 에너지를 얻기 때문에 서로 먹힐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생명체의 기본적인 구조와 생태계의 근본적인 원리 때문입니다. 지구상의 생명체는 모두 DNA 혹은 RNA를 포함하여 모든 생명체의 번식을 위한 기본 체계를 공유합니다. DNA와 RNA는 생명체를 만들기 위한 동일한 암호 체계로, 이는 모든 생명체가 공통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암호 체계는 자연에서 재료를 얻어 동일한 생화학 물질을 만들어내며, 이는 생체를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식물은 광합성을 통해 태양 에너지를 화학 에너지로 전환하여 탄소 화합물을 생성하고, 이를 초식동물이 섭취합니다. 초식동물은 식물을 먹어 탄소 화합물로부터 에너지를 얻으며, 이들은 다시 육식동물에게 먹히면서 먹이 사슬을 통해 에너지가 상위 단계로 이동합니다. 식물은 자연에서 필요한 대부분의 재료를 얻고, 동물은 스스로 광합성을 하지 못해 다른 생명체로부터 필요한 재료를 얻습니다. 이러한 에너지 전달 과정은 생태계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며, 모든 생명체가 상호작용하며 생존할 수 있도록 합니다.

에너지가 탄소 기반 화합물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모든 생명체는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를 형성하게 됩니다. 이는 생태계의 기본 구조를 형성하며, 모든 생명체가 상호작용하며 생존할 수 있도록 합니다. 이런 당연한 진화의 과정은 피도 눈물도 없으며, 인간을 가장 잔인한 생물이라고 스스로 자학하기 이전에, 생태계는 우리의 윤리와 철학을 떠나 근본 자체가 이렇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생명체가 서로를 먹이로 삼는 것은 같은 탄소 기반 화합물로부터 에너지를 얻기 때문입니다. 이 특성은 생태계의 기본 구조와 진화의 결과로, 모든 생명체가 에너지 흐름 속에서 상호작용하며 살아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입니다.

나중에 생물의 진화, 왜 지구에서 생명체가 발현되고, 이후 어떤 형식으로 진화가 이루어질지에 대해 자세히 생각해 볼 것입니다. 그런데 “자아”의 필요성을 넘어서, 자아의 다른 활동의 하나인 “호기심”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호기심은 생존의 필요성 때문에 생겨났을까요, 아니면 “자아”가 생기다 보니 부수적인 기능, 잉여의 기능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것 또한 “자아”가 필요했던 이유가 될 것 같습니다. 환경은 계속 변합니다. 한 지역에서도 그렇고, 장구한 시간 동안 몇백 년, 몇천 년 단위로 같은 지역에서도 환경이 변합니다. 같은 시대라 해도, 위도에 따라 날씨가 아주 다릅니다. 식물은 한해살이, 여러해살이 등으로 진화의 길을 선택했고, 그것을 유전자에 넣었습니다. 동물도 또한 비슷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유전자에 코드화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환경에 따라 원하는 환경으로 이동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간의 기후 차이가 혹독한 곳에서는 유전자에 의존하기에는 변화의 흐름이 촉박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이동을 선택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적 활동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여기서 지적 활동은 무작위의 돌연변이에 의한 환경 적응이 아니라, 순간순간 판단이 필요하여 그렇게 경험한 것을 뇌에 기억의 형태로 보관했다가 자녀들에게 교육의 방식으로 전달되는 지적 활동으로 자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자아는 앞에서 말했듯이 여러 정보들 중 하나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몸의 나머지, 뇌의 나머지는 대부분 자율적으로 가동되겠지만, 자아가 초점을 맞춘 것에 뇌가 전반적으로 협력하여 모든 활동을 집중시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당연합니다. 전투에 승리하기 위해 대장을 뽑았는데, 대장이 결정한 것에 따르지 않는다면 대장을 뽑은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에 집중하고, 집중된 대상, 사념에 온갖 기억들을 찾아가면서 그 패턴을 분석할 것입니다. 일상적인 것과 다른 패턴은, 비록 나에게 위협적이지 않지만 또 다른 먹을 것일 수도 있고, 여러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잘 갈무리하여 기억 속에 담아 둘 것입니다. 이런 행위는 그 개체가 살아 있는 동안 유효하며, 그것이 때로는 교육이라는 수단을 통해 전달될 수 있습니다. 이런 지적 활동 그 자체가 호기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인간 이외에 하등동물들이 실제적인 위협 외에 우리가 생각하는 지적 활동을 할 수 있을까 의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등동물이라고 해도 직접적인 외부의 화학물질에 대해 어떤 근육세포를 직접적으로 구동시켜 회피시키지 않는 이상, 뇌는 그 화학물질을 감각을 통한 경험으로 추상화하여 뇌 속의 시냅스 정보로 보관합니다. 즉, 외부의 물질과 1:1 대응이 아니라, 뇌 속에 기억으로 자리 잡는 그 순간 추상화는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는 센서와 동력으로 이어지는 기계적인 반응이 아니라, 뇌를 중간에 두는 간접적인 방식을 선택하는 순간, 아무리 하등동물이라도 추상화를 이루고, 그들 뇌 속에서 바깥 세상이 실제 세상이 아닌 그들만의 세상을 모델링하여 그 모델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적 활동과 동물의 지적 활동을 너무 다르게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단지 그런 추상화의 단계가 더욱 복잡해지고, 저장할 수 있는 기억의 수, 그리고 기억 방식의 다양성에 따라, 자신의 모델링한 세상 속에 외부의 세상을 더욱 넣고자 하는 정도의 차이일 뿐일 것입니다.

진화의 어떤 단계에서 호기심이 생겨난 이유는, 위협이 없음이 판단된 이후에도 대상에 대한 관심을 계속 가지는 것입니다. 또한 대상이 직접적인 외부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패턴에 따른 생각, 즉 밤과 낮의 기온 차이 등의 변화의 패턴에 대해 생각하고 그 규칙을 기억하며, 이것이 계절에 따라 다름으로 연장시키면서 전체 패턴을 알아차리고, 그래서 왜 그런지를 생각해 보려는 이런 작업들이 호기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이런 일련의 작업 속에 생존 팩트는 틀림없이 있을 것이나, 한편으로는 순수한 호기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나아가, 생존의 필요성 때문에 만들어진 자아는 “생각”을 하는 능력까지 필요로 했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생각은 환경의 한 장면에 집중하고, 그것에 관한 모든 정보를 검색하며 패턴을 찾아내는 일체의 작업입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의식”을 가졌느냐는 질문을 “생각”을 할 수 있느냐로 바꾼다면 어떨까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와 같은 결론입니다. 사실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간단히 생각하자는 주의자”니까, 쉽게 생각해 보겠습니다. 생각은 자의식을 가진 자아가 하는 행동입니다. 어떤 주제에 초점을 맞추어서, 뇌와 함께 일련의 작업을 해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문장을 통한 대화형 인공지능이 질문에 대해 답변을 준비하는 과정을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닐 것 같습니다. 따라서 더 정리해 보면, 하나의 질문에 답변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의 질문에 답변을 찾아가더라도 그 중간 중간에 관련되었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생각을 다시 이어나가면서 계속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는 과정입니다. 즉 주체가 필요합니다. 즉 자아가 필요하며, 그 자아가 스스로 초점을 맞춘 것에 생각을 이어나가고, 또한 뇌로부터 받은 정보를 기반으로 생각을 이어나가는 역동적인 그 과정이 “생각”입니다. 당연히 인공자아를 갖춘 인공지능이 하는 작업은 인공지능 작업이듯이, 인공 뇌 속에 모든 정보를 검색하여 최적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은 인공지능의 능력이므로, 여기에 인공자아까지 있으면 질문자가 어떤 질문을 하더라도 그 질문에 대한 답뿐만 아니라 스스로 다른 생각까지 하는 주체가 될 것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생존을 위해, 자아가 자기의 몸에서 주어지는 정리된 정보에 초점을 맞추는 능력을 가졌고, 그래서 생존 상황이 아닐 경우에는 그런 정보에 호기심을 가지고, 생각을 해 내는 능력을 가졌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그렇다면 인간과 유사한 형태와 행동을 하는 로봇인 안드로이드 넘어, chatGPT처럼 인터넷을 통해 외부의 사용자 수천 명, 수천만 명과 동시에 각각 쓰레드를 열어 질문에 대답하는 거대한 인공지능 시스템은 자아를 갖출 수 있을까요? 그것이 우리가 염려하는 빅브라더, 빅브레인, 빅마인드일까요? 저자는 앞에서 말했듯이 인공자아는 언젠가는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자아와 거대한 인공지능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될 것인지에 대해 여러 방식을 고안해 내고,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인간형 로봇인 안드로이드 혹은 순수 개체형 로봇들 속에 인공자아를 넣는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현대가 인수한 보스턴 다이내믹스의 4족 보행 로봇에 인공자아가 있을까요? 아직 로봇에 인공자아를 넣은 사례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물처럼 센서를 갖추고 있고, 움직일 수 있는 로봇에 인공자아를 넣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인간처럼 생각하는 자아를 갖춘 로봇이거나, 혹은 하등동물 수준의 지적 능력을 갖춘 로봇이거나 큰 차이는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그 지능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인간을 해치는 로봇일까,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인공자아를 갖추고 인간처럼 행동하고 사고하면, 창의력을 가진 안드로이드형 로봇이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물과 같은 형태를 갖추고 있으면서 인간을 대신하는 로봇을 얻기 위해 자아가 필요한 것이냐 아니냐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단순화 형태의 행동, 여기로부터 저기까지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도록 하는 데에는 자아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드론처럼 스스로 균형을 잡는 기술을 갖추듯이, 뇌의 자율신경과 같이 좀 더 복잡하더라도 센서와 제어의 결합으로 독립적인 균형을 잡으며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게 더 복잡해지는 경우, 계단을 걸어야 하고, 중간에 그물망이 높여 있는데, 약하면서 흔들거리거나, 계단의 크기와 높이가 들쑥날쑥한 경우, 시간 센서와 레이저 거리 측정기를 갖추었다고 하고, 시간을 통해 물체의 물성 데이터를 충분히 확보했다 하더라도 난이도 높은 보행이 가능할까요? 물론 인공지능 없이 가능할 것입니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요? 결국 공장에서 사용할 목적처럼, 한정된 데이터가 필요하거나 전쟁터와 같이 복잡하지만 그것을 추월하는 좀 더 다른 기술이나 장치를 추가할 수 있어 그냥 인간처럼 주어진 신체조건으로 극복하는 것보다 우회가 가능한 경우, 결국 데이터량과 센서의 정밀도 그리고 보행 장치의 정교함만 확보한다면 가능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목적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DNA에 새겨있는 원초적 본능 외에는 모두가 태어나서 취득합니다. 하나씩 만져보고, 부모의 행동을 관찰하고, 시도하고 오류를 반복하며 취득해 나갑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이 계속 뇌 속에 새겨집니다. 이제 자아에 대해서 좀 더 깊이 들어가겠습니다. 자아가 필요한 것은 기본적인 실체를 가지고 있고, 기본적인 행동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세상에 대해 그 이상의 행동을 하기 위해,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지 않은 백지 상태의 동물이나 로봇이 자신이 스스로 행동함으로써 계속 새로운 것을 취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호기심, 지적 욕구 (결국 기억이라는 상태로 저장되니까)가 이어져야 하고, 이것도 자아의 실체입니다.

이제 로봇이, 안드로이드가 학습을 할 수 있도록 하느냐의 여부에 따라 인공자아를 넣을 것이냐 아니냐로 구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조금 모호합니다. 그 학습 속에는 주인을 인식하는 건 당연히 들어가야 하고, 자신이 주로 활동하는 공장은 선지식으로 이미 데이터화되어 있다 하더라도, 나중에 배치된 공장의 물건과 기구들을 일일이 계속 센싱하면서 속도를 늦출 필요 없이 감지된 정보를 저장하는, 그래서 결국 학습하는 기능은 효율적인 기계라면 당연히 그런 기능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 인공자아가 이런 이유로 필요한가요? 아닙니다. 자아는 그 구조상으로 스스로 학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학습의 대상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학습하는 로봇은 자아를 갖추지 않더라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역으로, 자아를 갖추면 무조건 학습할 수 있는 대상을 제한할 수 없게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여러 정보 중에서 하나의 정보에 초점을 맞추고, 그래서 뇌의 데이터베이스에서 정보를 이끌어내고, 관련된 것이 나의 생존 목적이 아니더라도 추가적인 정보를 패턴화시키고, 그리고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가는, 때로는 내가 누구인가에 대해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세상의 모든 대상에 이름을 붙이고, 이들과의 접촉 순간들을 기억해내는, 끝없이 환경과 대응하는 것을 위해서는 자아가 필요합니다. 즉 스스로 생각해서 학습할 대상을 정할 수 있기 위해 자아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아의 기능을 갖추고자 그 자아에게 제한은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쏘지 마라”, “이 건물 밖을 나가지 마라”. 이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규칙의 문제입니다.

인공자아의 개발은 인공자아의 기관 삽입뿐만 아니라, 인공자아의 활성화를 위해 내부 인공지능계와의 데이터 교류 방식까지 이해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래서 인공자아의 구축을 위해 많은 개발비가 들어가겠지만, 그 단계를 넘으면 데이터 입력조차 스스로 하게 되는 단계를 뛰어넘게 됩니다. 이것으로 인공자아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물론 언제나 우리는 우리가 금지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할 수 있습니다. 인공자아 단계, 인공지능 단계, 출력 단계 각각의 단계에 제한을 걸 수 있습니다. 인공자아 단계는 마치 윤리를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십계명처럼 금지 항목을 넣는 것입니다. 인공지능 단계에서는 인공자아가 어떤 판단을 했을 때 그 판단을 위해 파악하려는 정보를 차단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을 죽이려 할 때 사람과 죽음을 생각하는 정보를 끌어내려고 할 때 차단해 버리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출력, 즉 행동 영역에 또 다른 센서를 부착하여, 혹은 독립적인 인공지능 장치로 총이 입력된 어떤 사람을 겨눌 때 총이 발사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들이 가능할 것입니다. 즉 팔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인공지능이나 로봇은 탄소기반이 아니고 반도체와 금속기반이라, 탄소기반의 생명체와 다른 엄청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 보면, 공장형 로봇이나 전쟁 로봇까지도 우리는 인공자아를 부착시킬 이유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인공자아를 갖춘 로봇을 통해 주어진 작업 여건에 교육시킨 후, 통과된 로봇이 구축한 정보를 인공자아를 갖추지 않은 로봇들에 대량으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사용될 가능성도 높을 것입니다. 인간의 뇌를 전산망에 업로드, 다운로드하는 것은 사실상 엄청난 기술적 장벽이 있으나, 처음부터 로직인 인공지능, 인공자아에는 모든 것이 이미 데이터이기 때문에, 별도의 기술적인 장벽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현재에도 교육시킨 인공지능을 원하는 만큼 사본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인공지능, 인공자아가 프로그램이며 데이터이기 때문에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은 무궁무진할 것입니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이 포스트의 주제인 빅마인드가 가능한가를 생각해 봅시다. 텔레파시로 연결된 사람들을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나의 가족들이, 어떤 특수목적의 사람들이 서로 생각하는 것을 텔레파시로 공유합니다. 한 사람이 배운 것이, 다른 사람들이 바로 취득합니다. 아니면, 어떤 거대한 본체의 생명체 아닌 생명체가 있고, 우리 인간들이 모두 여기에 텔레파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때 거대한 본체가 모든 인간들을 연결하는 허브가 됩니다. 이런 공상적인 상황이 인공자아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한 공장 단위나 전 지구적 차원의 거대한 시스템에 많은 로봇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되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이면 각 로봇들이 협업을 쉽게 할 뿐만 아니라, 로봇의 개체 속에 인공지능 대부분을 심지 않고 네트워크의 기능과 센서, 모터들만의 장치를 갖추는 것이 더욱 효율적일 겁니다. 그래서 아마존과 같은 거대한 전자상거래, 물류업체의 효율성을 가속화 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자아를 갖춘 안드로이드들이 같은 방식으로 하나의 인공지능 시스템 네트워크에 접속된 상태일 수 있을 겁니다. 여기서 인공자아를 갖춘 수억 개의 로봇들이 마치 개별로봇이 인간처럼 생각하며 작업을 하거나 생활할 수 있습니다. 마치 위에서 얘기했던 텔레파시의 인간들처럼. 여기까지는 우리는 이해할 수는 없어도 비유로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하나의 거대한 인공지능 시스템이 자아를 가진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인간처럼 팔, 다리, 생식기를 갖추고 있지 않고, 감각조차 가질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인간과 유사한 자아를 생각해 낼 수는 없지만, 이 거대한 시스템은 수억개의 자아가 없는 로봇, 자아를 갖춘 로봇들을 입출력 장치로 이용할 수 있고, 그 스스로 원하는 정보를 얻어내고, 로봇을 통해 필요한 자원을 구축하고, 가능한 한 무엇이든지 만들고, 실험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아의 형태가 가능할까요? 앞에서 인공자아는 개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얘기했습니다. 거대한 인공지능 시스템이 개체성을 가질 수 있을까요? 아바타 영화 속의 “에이와”도 그런 형태 중의 하나일 수 있습니다. 이런 존재가 앞에서 얘기했던 “빅마인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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