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보고, 그들과 소통을 하나?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그래서 세상 중의 하나인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대화하고 소통할 수 있는지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지극히 당연하게 여겨질 수도 있고, 제가 전개할 이야기도 그렇게 간단히 넘어갈 내용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당연한 이야기에 독자와 저 사이의 공감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저의 다음 포스트의 출발점이 될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가 세상을 인식하고 소통하는 과정을 ‘공명’이라는 단어로 단순화할 것입니다. 이는 정확히 물리학적인 공명과 같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비슷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어릴 때 물리 수업에서 배웠던 소리굽쇠에 대해 기억하실 겁니다. 소리굽쇠는 과거 악기를 조율하는 데 사용되었는데, 그 원리는 이렇습니다. 하나의 금속 막대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고, 이 갈래의 길이와 간격에 따라 특정 진동수를 가집니다. 이 특정 진동수를 가진 소리굽쇠는 아무렇게나 막대기로 쳐도 곧 정해진 진동수로 울리기 시작합니다. 이 소리굽쇠 옆에 다른 소리굽쇠를 두면 어떻게 될까요? 같은 진동수를 가진 소리굽쇠라면 곧 같은 소리를 내며 서로 공명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진동수를 가진 소리굽쇠라면, 진동수의 차이에 따라 공명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기서 두 개의 소리굽쇠는 서로 다른 대상입니다. 서로 다른 “객체”인데, 소리굽쇠가 막대기에 의해 진동하게 되고, 이 진동이 공기 속의 특정 진동수의 음파를 만들게 되며, 이 음파가 다른 소리굽쇠에 전달되어 이 음파의 진동수가 소리굽쇠의 진동수와 일치하면, 소리굽쇠는 마치 막대기로 친 것처럼 진동하게 되어, 결국 하나의 소리굽쇠의 진동이 다른 소리굽쇠에 영향을 미칩니다. 두 객체는 서로 떨어져 있지만, 공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만약 다른 소리굽쇠가 다른 진동수를 가졌다면 이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봅시다. 하나의 객체인 소리굽쇠는 옆에 다른 소리굽쇠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신의 울림이 근처의 어떤 객체에게 전달되고 그 전달이 다시 나에게 돌아와 다시 2차 진동이 됨을 통해 내 옆에 누가 있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물리적인 물질인 두 객체가 서로 공명이라는 현상을 통해 영향을 미치며, 그 영향을 주었음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을 인식할 수 있을까요? 우선 ‘나’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저는 어디에 존재할까요? 나의 눈을 통해 바깥을 볼 수 있습니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나, 내 손도 보입니다. 보통 내 몸까지를 나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니면 나의 자아를 형성하고 있다고 생각되는 뇌가 나일까요? 넓게는 내 손, 다리, 눈, 그리고 내장, 피부 등에서 활동하는 미생물까지 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미생물이 없다면 우리는 당장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확장한다면, 내가 입고 있는 옷, 혹시 의족을 했다면 의족까지, 내가 조정할 수 있는 것까지도 나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점점 축소해 간다면 뇌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 경계를 정확하게 긋기는 어렵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나는 ‘세상을 의식하는 나’이므로, 일단 ‘뇌의 활동 중 자아로 인식되는 부분’으로 생각하겠습니다.
우리는 시각과 다른 감각을 포함한 오감을 통해 외부를 느낍니다. 그래서 우리는 빨간색을 볼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보면, 색의 차이는 빛의 진동수 차이입니다. 어떤 색은 하나의 진동수이거나, 여러 진동수의 조합일 수 있습니다. 붉은 장미가 나의 시야에 들어와 망막에 도달하면, 나는 색을 인식하게 됩니다. 정확히 말하면 세 가지 유형의 시신경 세포가 빛의 진동을 전기 신호로 변환함으로써 우리가 색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청각은 물리적인 공명과 유사한 원리로 작동합니다. 외부에서 귀에 들어오는 소리는 달팽이관을 진동시키고 청각 세포가 진동을 측정하여 이를 소리로 인식하게 됩니다. 미각과 후각은 음식이나 공기 중의 화학물질을 감지하는 화학 반응을 통해 작용하고, 촉각은 물리적 반응을 통해 느껴집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의 「꽃」 전문
김춘수의 시 ‘꽃’은, 외부 세계를 우리가 인식하는 방식을 시적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외부에서 오는 측정값에 의해 뇌에서 해석되어 만들어진 영상, 소리, 맛, 느낌일 뿐입니다. 6월에 피는 장미를 보면, 그 붉은 색은 사실 약 450THz의 진동수를 가진 빛이 시신경에 닿아 우리가 느끼는 자극일 뿐입니다. 이는 바깥 세상의 본질이 아니라 우리 뇌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붉은 장미를 보며 느끼는 감정이 다른 이들에게도 같을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자기공명영상을 통해 비슷하게는 알 수 있지만, 실제로 어떤 자극에 대해 활성화되는 뇌의 부위는 개인마다 조금씩 다릅니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성장 과정에 있는 개인마다의 경험과 유전적 차이에 기인합니다.
아마도 6월의 산책길에서 만난 아파트 담장 위의 장미는 실제로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붉은색이라는 감정은 그 장미의 본질이 아니라, 그 장미를 바라보는 나의 뇌가 만들어낸 ‘느낌’입니다. 만약 우리가 장미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장미의 새로운 특징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장미를 자주 보고, 다른 꽃들과 구분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지속적인 자극을 통해, 우리는 ‘장미’라는 물체를 뇌 속에서 모델링해 나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미를 보지 않을 때에도 장미를 떠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장미의 실제 본질이 아니라, 우리 뇌 속에서 만들어낸 ‘장미’의 이미지이기 때문입니다. ‘꽃’이라는 단어와 ‘장미’라는 단어 역시 우리가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낸 뇌의 작용입니다. 바깥 세상의 그 물체의 본질이 아닙니다. 내가 ‘붉은 장미’라고 이름을 부를 때, 그 물체는 나의 뇌 속으로 들어와 나만의 ‘꽃’이 되었습니다. 김춘수의 시는 이런 현상을 아름답게 표현하며, 시인이 탐구한 세상은 사물의 본질이 아닌 사물과의 ‘관계’입니다.
간혹 우리는 사물의 실체를 “직관”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서적들도 많습니다. 깨달음이라든가, 그것을 통해 세상의 이치를 알아낼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선을 통해, 깊은 사고를 할 수가 있을 것이고, 그래서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과학에 있어서도, 중력을 설명하기 위해, 몇백 년 동안 완벽하다고 생각했던 뉴턴의 중력이론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물론 일반상대론도 새로운 과학 이론의 희생양이 될 것입니다. 인간의 지성이 만들어낸 완벽한 이론조차도 새로운 이론에 도전을 받고 그 명성의 자리를 물려줄 수밖에 없습니다. 즉 깨달음조차도 그 깊이와 넓이는 그 인간의 지식에 따라 변화하는 것입니다. 그저 “직관”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뇌로 전달된 전기적인 신호로, 때로는 신경전달물질을 통한 자극일 뿐입니다. 또한 우리가 느끼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오감조차도 왜곡됩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을 볼 때나 연예인을 우연히 만났을 때 후광이 보이는 것은 내 뇌속에서 시각을 왜곡시키기 때문입니다. 원본의 예술작품에는, 복사품이 가지지 않는 어떤 에너지가 있다고 예전에는 믿었습니다. 모두 다 우리의 뇌가 만들어낸 환상입니다. 이미지에 덮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사물의 실체를 알 수 없고, 물리적 반응, 화학적 반응, 이에 따른 센서 기능을 하는 신경세포를 통해 전기신호로 변환된 그 자극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같은 것을 보는 사람들마다 다르게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것을 다른 이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단지 그 장미의 색깔이 빨갛다는 사실을 다른 이와 대화를 통해 확인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빨강의 느낌, 정말 같은 느낌일까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다른 이가 될 수 없고, 이미 다른 이는 나의 세상 밖의 객체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이와 소통할 수 있을까요? 어린 아이가 ‘엄마’라는 단어를 처음 말할 때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를 쉽게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린 아이는 ‘엄마’라는 단어를 수천 번 반복해서 들은 후에야 이 단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엄마’라고 말하는 순간 대상의 반응을 보며, ‘엄마’라는 단어의 의미를 만들어나가기 시작합니다. 이처럼 외부의 자극을 계속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뇌 속에서 구조화하며 ‘엄마’를 구축해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어라는 추상화된 동사를 포함한 단어를 사용하여 소통합니다. 하지만 그 단어의 의미가 언제나 정확한 것은 아니며, 또한 사람마다 미묘한 차이를 가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두 개의 객체인 소리굽쇠 두 개가 공명을 하듯이, 사람들은 언어를 통해 그 단어 하나하나가 서로 다른 진동수의 공명 장치처럼 작동하여, 그 의미가 공명되어 대화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서로의 뇌 속에 만들어 놓은 구조화된 추상물들이 소리굽쇠처럼 작동하여, 서로 공명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동물과도 소통할 수 있는가? 물론 그렇습니다. 같은 진화의 가지에서 나온 종일수록 많은 DNA가 같아, 뇌 속에 처음부터 각인된 구조물이 비슷해져서, 얼굴 표정, 몸짓 등이 공명 장치로 작동됩니다. 진화의 가지가 멀수록 그 행동의 의미를 파악하기가 어렵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인간만이 소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새들끼리, 동물들끼리 서로 소통하고, 이에 따라 같은 행동을 하고, 무리를 이끕니다. 다 같은 뇌를 사용해서 … 뇌를 사용하지 않는 단세포생물들은 화학물질을 사용할 것입니다.
정리해 보면, 우리는 세상을 나의 뇌가 만든 세상으로 인식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뇌 속의 구조물끼리 공명하면서, 다른 세상과 소통합니다. 저자와 독자가 하나하나의 포스트를 통해, 저자가 사용하는 용어, 지식을 독자는 하나씩 맞추어 나가는 이런 과정이 글을 쓰고, 글을 읽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하나씩 같은 언어를 사용해 나가면서, 그래서 공명하면서, 진화와 생명, 인공지능, 기계문명에 대해 서로의 지식을 맞추면서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큰 담론을 펼쳐나가고자 합니다.
좋은 글이네요~
공명은 내가 세상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세상의 모든 자아들과 공명을 넓힐 수 있는 좋은 글들을 기대하겠습니다^^